Friday, June 6, 2014

한공주를 아시나요?


“전 잘못한 게 없는데요?” 소녀가 말했다. 소녀를 에워싸고 서 있던 어른들의 인상이 일그러진다. 공기가 무겁다. <한공주>는 이렇게 희미한 물음표로부터 시작되는 영화다. 영화는 중반부까지도 한공주(천우희)가 썩 좋지 못한 상황에 처했다는 예감만을 흘릴 뿐, 이 소녀가 처한 상황에 대해서 속 시원하게 설명해 주지 않는다. 그리고 플래시백을 통해서 모종의 단서들을 하나씩 던져준다. 이 단서들은 점차 소녀에게 무언가 끔찍한 일이 있었을 것이란 예감으로 부푼다. 그리고 너무도 무덤덤해서 더 참혹한 현장을 목격해야 한다. 그러나 그 참혹한 과거의 재현보다 더 끔찍한 건 따로 있다. <한공주>는 실화를 모티프로 제작된 영화다. 영화의 반석이 된 실화는 2004년 밀양에서 벌어졌던, 고교생들의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이다. 이 사건이 충격적이었던 건 가해자가 고등학생이며 그 수가 수십 명에 달했고, 지속적인 협박과 폭력으로 어린 여학생을 1년 가까이 유린했다는 점이었다. 더 큰 문제는 수면 위로 올라온 이 사건이 기이한 방향으로 밀려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가해자에 대한 응당한 처벌은 고사하고 피해자와 그 가족들이 심각할 정도로 외면당하거나 되레 가해자나 가해자 부모들로부터 린치를 당했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사건을 수사하던 형사들이 피해자인 소녀들에게 모욕적인 언행을 서슴지 않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공분을 일으킨 바 있다.

이수진 감독은 <한공주>가 실화를 재현한 영화가 아니라고 말했다. 그것이 이 영화와 실화와의 연관성을 부정하는 의미는 아닐 거다. <한공주>는 사건 그 자체에 집중하지 않는다. 객석의 관객을 분노의 도가니로 밀어 넣지 않는다. 오히려 차분하고 정적인 시선을 통해 객석의 관객에게 목격자로서의 책임감을 짊어지게 만든다. <한공주>를 보고 남는 참담함이란 영화가 비추는 현실에 대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막막함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과거보다 더욱 끔찍한 작금의 현실을 환기시키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누군가는 죄를 짓는다. 그리고 누군가는 피해자가 된다. 죄를 지은 사람은 벌을 받고, 피해를 입은 사람에겐 어떤 식으로든 회복의 기회가 주어진다.

<한공주>에선 우리가 당연하다고 믿었던 것이 아무렇지 않게 파괴될 수 있다는, 실제로 산산조각 나고 있음을 목격하는 과정이다. 멱살을 잡혀 몽둥이로 얻어맞는 기분을 느낀다 해도 이상하지 않다. 한공주는 음악을 좋아한다. 실제로 재능도 있다. 하지만 소녀는 수영에 관심이 많다. 친구들은 이유를 묻는다. “왜 그렇게 열심히 수영을 배워?” 한공주가 답한다. “나중에 물에 뛰어들었을 때 혹시라도 살고 싶을까 봐.” 이 대사는 우리가 작은 소녀에게조차 스스로 발을 굴려 나아가지 못하면 살 수 없는 생존 본능을 일깨우는 사회에서 살고 있음을 통감하게 만든다. OECD 가입국 중 청소년 자살률 1위 국가인 대한민국의 어른들에게 <한공주>는 통증이다. 통증을 전하는 영화다.

<한공주>의 엔딩 신, 다리 위에 서 있던 공주는 사라지고, 그 아래의 수면에선 소녀만 한 크기의 작은 물거품이 일어난다. 그리고 곧 수면 위로 떠오른 소녀는 자맥질을 하다 사라진다. 그 물거품이 사라질 즈음 갑작스런 환호와 함께 수면 아래 수영을 하며 나아가는 소녀가 보인다. 어떤 꿈이 발을 구르며 나아간다. 그렇다면 이건 해피 엔딩인가? 그것보다 우린 이 결말을 해피 엔딩이라고 말할 자격이 있는가? 우린 여전히 저 깊은 바다에 있는 수많은 소년과 소녀들을 붙잡아주지 못하고 있다. <한공주>의 결말을 해피 엔딩이라 말할 자격이 없는 어른들의 사회에서 살고 있다. 우리가 당연하다 생각하는 것들이 얼마나 손쉽게 침몰되어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버렸는지, 목격해야 한다. <한공주>를 목격해야 한다. “제가 사과를 받는 건데 제가 왜 도망가야 해요?”라는 소녀의 질문으로부터 달아나선 안 된다. 그리고 기억해야만 한다. 결코 잊어선 안 된다. 저 수면 아래에 잠겨버린 수많은 꿈들을, 잊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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